미칠 것 같은 이야기
미칠 듯이 숨막히는 잿빛 하늘 아래, 슬픈 눈의 두 청춘이 있었습니다. 시대가 하 수상하여 의지할 곳 없던 외로운 영혼들이었지요. 남자는 늑대의 편에, 여자는 인간의 편에서 살아가고 있던 중 거짓말과 같은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은 붉은 코트를 입은 한 소녀의 죽음 때문이었는데,이 들의 이야기는 잔혹한 빨간 두건처럼이나 잔인한 결말을 향해 치닫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미정해진 이야기라 아무리 발버둥치려해도 어찌 거세게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의 삶이 있고, 늑대는 늑대의 삶이 따로 있는 법이니까요.
오시이 마모루가 원작과 각본을 쓰고 제작에도 참여했다는 이 걸작 애니메이션을 전 운좋게 2000년에 국내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킹덤’을 소개하면서 잠깐 언급했는데 (그래서 다시 찾아보고 이렇게 글을 쓰지만) 역시나 가상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배경이 소개되는 오프닝을 유심히 봐두지 않으면 스토리를 따라가는게 좀 난해한 작품입니다. 2000년 개봉 당시 국내 극장 상영판에서는 본작 앞에 간단한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시대상황과 권력의 구도를 설명한 영상이 첨부가 되었습니다.
‘인랑’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시이 마모루의 이전 작 (비록 이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가 감독한 작품은 아니지만)만큼이나 사실 좀 난해합니다. 그 유명한 공각기동대의 너무 앞선 사이버펑크적 개념은 등장하지 않지만 잔혹한 ‘빨간 두건’의 구전 버전을 토대로 이어나가는 두 주인공의 잔인한 운명에 관한 동화와 군경 세력의 암투가 병행하여 진행되는 이야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만큼 짜임새가 있으며, 동시에 매우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두 사람의 슬픈 운명에 안타까워 하기만 하며 영화를 보다가는 마지막 반전 아닌 반전에는 그냥 액션 장면만 넋을 잃고 바라봐야만 할지도 모르지요.
공각기동대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섰다가 스토리 이해 못하고 질려 버렸던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간에 보아왔던 일본 애니 답지 않게 색상도 매우 우중충한 ‘엄마 찾아 삼만리’ 스러운 컬러를 보여주는데다가, 뭔가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을 기대해 보아도 전반적으로 매우 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설정상 주인공의 저정도의 움직임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방탄 갑옷을 입고서 한 손에는 MG42를 들었는데 뛰다니요!) 몸놀림인 것이지만, 사실 저 스스로도 ‘공각기동대’의 액션을 생각하고 극장에 갔다가 그 부분에서는 적잖이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총격전’은 기대하기 힘들죠. 거의 일방적인 학살극이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들 틈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늑대는 마음 한 구석에 ‘인간성’이라는게 조금이나마 자리잡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늑대에는 늑대의 삶이 따로 있고 그것이 늑대의 이야기이지만, 주제 넘게 사람을 사랑하려 했고 사람의 마음을 가슴에 담아둔 죄로 회복하기 힘들만큼의 상처를 자신의 발톱으로, 자신의 이빨로 제 심장을 물어뜯고 할퀴어 만들어냅니다. 인생은 그만큼 처절하고 사랑은 그 만큼 버거웠던 두 영혼의 이야기. 군더더기 없는 대사들 하나하나가 가슴에 남지만 다음의 한 마디가 이 영화를 거의 압축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네요.
‘당신도 외로울거라 생각하면 자꾸 희망을 가지게 되요.’
늑대의 탈, 사람의 탈. 늑대의 마음, 사람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