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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의 남자 – 39

경황이 없었다. 야근 후 늦은 귀가로 겨우 잠이들 무렵에 병원에 와 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아 어떡하지 예매해둔 기차의 출발시각은 너무 멀다. 차로 가자니 역시 너무 오래걸린다. 결국 그 새벽에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 항공권을 예매했다. 첫 비행기를 타려면 한 시간 내에 모든 걸 챙겨가야한다. ActiveX를 다섯 개 정도…를 여덟번 정도 설치했다. Excellence in flight가 아니라 Insanity in hompage가 더 어울리겠다.
그리고 정말 자로 잰듯이 수속도 맨마지막에, 탑승도 맨마지막에 아슬아슬하게 첫비행기를 탔다.
새벽에 이미 양수가 터진 거라, 탑승 전 마지막 통화에서 아내는 이제 곧 촉진제를 맞을거라 했고, 기내에 들어선 나는 그제서야 왠지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겁 많기로 울산 지방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내가 새벽에 양수가 터지고 병원을 가는 응급 상황에 처했는데, 그는 굉장히 차분한 목소리와 말투로 나에게 기차는 늦을 것 같으니 비행기로 오라고 그 새벽에 연락을 한 거 자체가 이상했다.
어쨌든 다행히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했고, 아내 곁에서 양파가 나올때까지 곁을 지켰다. 패닉에 빠져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바와 달리 그녀는 내 머리채를 쥐어 뜯는다든지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진통 다섯시간째. 아기는 좀 아래로 내려왔는데, 자궁 경부는 반쯤만 열렸단다. 아내의 평소 체력이나 지금까지 겪은 고초를 생각할때, (의사의 판단은 뭐가 됐든) 아내가 네다섯시간을 더 진통을 참으면, 정작 애 낳을 힘이 없을 것 같았다. 걱정이 되었지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데굴데굴 구르는 수준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고통에 호흡이 힘들었고, 이내 양파의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자궁경부가 거의 다 열렸단다. 아니나 다를까 그리고 아내는 힘을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의사가 도착하고 나니 그냥 낳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양반은 15분이면 나오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거의 한시간이 걸려서 결국 양파가 태어났다. 호흡법에 대해서는 이번 주 쯤 인터넷을 찾아볼 예정이었던 아내는 참으로 기특하게 호흡도 잘하고 힘도 잘 줘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위기를 잘 극뽁~해주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갓 태어난 핏덩이를 엄마 품으로 데려와 젖을 물리는데, 그걸 보니 진정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앞으로의 인생은 지금까지와는 아주 많이 달라지고 또 때로 힘든 날이 더 많아지겠지만, 아내와 양파와 함께 지내는 나날이 그 자체로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